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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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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 물의 정성분석 / 마종기 동양이고 서양이고 물이란 게가만히 앉아 있는 성질이 못 되어찢어진 곳이거나, 보이지 않는틈까지 찾아가, 미세한 결핍까지채우고야 흐르는데떠나고 헤어지는 게 버릇이지만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공중으로 온몸을 날려소식도 안 남기고 증발해버리지.물에게 제 모습을 간직하라고강요할 수는 없다.원래의 모습이란 게 무엇일까.가벼운 수소와 산소가 만나함께 살기로 한 날부터정성분석 실험실은 늘 젖어 있었다.물은 아무의 말도 듣지 않는다.철들 나이가 되어도무리를 떠난 물은, 목숨이위험하다는 것을 모른다.물은 물끼리 만나야 산다는 것,서로 섞여야 살 수 있다는 것,그나마도 모를 것이다.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물은 어느 때부터 알았을까.호흡이 무너지며 글썽이는 물.함께 살았던 날들만반짝이는 축제였다는 걸언제부터 알았을까.그러나..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제 삶의 이유였던 것제 몸의 전부였던 것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방하착(放下着)제가 키워 온,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가장 황홀한 빛깔로우리도 물이 드는 날  ​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기를"이라는 시문구를 음미하다보면가을산 곱게 물든 단풍나무를 바라보면 일맥상통하다는 생각이 든다. 빙하착, 버릴 때는 아낌없이 버려야 내년 봄엔 더 푸르고 멋지게 성장할 것이다.
[추천시] 무슨 색깔이 나올까 / 조병무 저 바람을 손아귀에 쥐고꼬옥 짜면무슨 색깔이 나올까저 하늘을 양손에 쥐고더욱꼬옥 짜면무슨 색깔이 나올까그러나그러나저 사람의 말씀을마음으로 눌러 짜면또 무슨 색깔이 나올까사랑하는 사람끼리그 사랑을 사랑으로 짜면정말무슨 색깔이 나올까
고목 / 복효근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육탈하기 좋은 때잘 마른 구멍 하나 가꾸고 싶다
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빈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덮어주려 하고 있다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덮어준다는 것,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 아닐까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지금 여기가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할 수는 없겠다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최선을 다하여아침 한나절을 몇 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시집  실천문학사 복효근1962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학교..
간절 / 이재무 삶에서 '간절'이 빠져 나간 뒤 사내는 갑자기 늙기 시작하였다활어가 품은 알같이 우글거리던 그 많던 '간절'을 누가 다 먹어치웠나'간절'이 빠져 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여생을 나무토막처럼 살 수는 없는 일사내는 '간절'을 찾아 나선다공같이 튀는 탄력을 다시 살아야 한다
떠날 때의 님의 얼굴 / 한용운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노래는 못 마친 가락이 묘합니다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눈물이 없는 눈으로 바로 볼 수가 없을 만큼어여쁠 것입니다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굴을나의 눈에 새기겠습니다님의 얼굴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무도 야속한 듯하지만 님을 사랑하기 위하여는나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가 없습니다만일 그 어여쁜 얼굴이 영원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겠습니다
봄바람 / 김애자 아지랑이 저만치서 햇살 속에 고물대면그 춤사위 함께 하자멀미하듯 보채는 맘 바람도 스카프 살랑 흔들며어서 떠나라 부추긴다 속 깊이 쟁여놨던내 안의 뜨거움을길 나선 봄바람이 자꾸 흔들며 깨우더니 한 송이, 고목 옆구리에매화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