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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

[추천시] 물의 정성분석 / 마종기



동양이고 서양이고 물이란 게
가만히 앉아 있는 성질이 못 되어
찢어진 곳이거나, 보이지 않는
틈까지 찾아가, 미세한 결핍까지
채우고야 흐르는데
떠나고 헤어지는 게 버릇이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
공중으로 온몸을 날려
소식도 안 남기고 증발해버리지.

물에게 제 모습을 간직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원래의 모습이란 게 무엇일까.
가벼운 수소와 산소가 만나
함께 살기로 한 날부터
정성분석 실험실은 늘 젖어 있었다.

물은 아무의 말도 듣지 않는다.
철들 나이가 되어도
무리를 떠난 물은,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른다.
물은 물끼리 만나야 산다는 것,
서로 섞여야 살 수 있다는 것,
그나마도 모를 것이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물은 어느 때부터 알았을까.
호흡이 무너지며 글썽이는 물.
함께 살았던 날들만
반짝이는 축제였다는 걸
언제부터 알았을까.

그러나 길 떠나지 않는 몸은
눈치만 보다가 죽고 만다.
움직여라. 게으른 물들,
좌절에 흔들려보지 않은 물은
얼어서 결박되든가,
썩어서 사라질 뿐이다.
흔들려라, 젊은 날에는,
그래야 산다.

물이여, 그렇다면 잘 가라.
한때는 빛이었고 별이었던,
눈꽃과 얼음으로 크게 피어나던
추억의 물이여, 잘 가라.
어딘가 높은 곳, 물의 가족이
애타게 부르던 소리도 희미해졌다.
길 잃은 물의 집이 어디였던지?

그날들이 다 지나고 돌아서면
한가롭고 자유롭고 싶어서일까,
방향을 바꾸어 하늘로도 향하고
색을 바꾼 구름이 되기도 한다.
가끔은 헤어진 인연을 못 잊어
비가 되어 땅에 다시 내려오겠지만
죽어서 하늘에 갔다는 말도
이제야 조금은 알 듯하다.

긴 비 그친 우리 마을에
큰 무지개 하나가 선다.
얼마 만에 보는 황홀이냐.
그렇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알몸의 물이 춤을 춘다.
물이 색이 되어 하늘에 올랐다.

<마흔두 개의 초록, 2015> 중에서


✍️
내가 좋아하는 대표작 '우화의 강'을 쓴 마종기시인의 시이다.

2개의 수소와 1개의 산소원자가 104.5도 각도로 수소결합으로 이루어진 물은 인간의 구성성분들중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삶의 원천이다.

물이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 알몸으로 춤을 추는 무지개로 비유한 것이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정표가 될정도로 각인되는 시어이다.

노자 도덕경에 언급된 상선약수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의미인데, 시인이 말하고자하는 의도와 일맥상통한 글귀이기도하다.

물은 본디 선하여 빈틈을 찾아 사람을 살리며 유구한 역사를 같이 살아온 동반자로서 인식을 못할뿐 우리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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